일론 머스크 프로필 출생지 나이 재산 출신학교 키 몸무게 어릴때 사진
테슬라 · 스페이스X CEO
FRS
일론 머스크 : Elon Musk
ㅇ 본명 : 일론 리브 머스크 (Elon Reeve Musk)[2]
ㅇ 출생 : 1971년 6월 28일 (53세)
ㅇ 출생지 :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리토리아
ㅇ 거주지 :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ㅇ 국적 : 남아프리카, 캐나다 , 미국 (삼중국적)
ㅇ 신체 : 188cm(6ft 2in), 85kg
ㅇ 직업 : 기업인, 엔지니어, 투자자
ㅇ 현직
- 테슬라 (테크노킹)
- 스페이스X (CEO)
- 보링 컴퍼니 (이사회 의장)
- 뉴럴링크 (이사회 의장)
- X Corp. (이사회 의장)
- x.AI Corp. (이사회 의장)
ㅇ 재산 :2,542억 달러 (한화 약 352조 7,400억원)
ㅇ 학력
- 퀸스 대학교 (1990년 - 1991년) (경영학 / 중퇴)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1992년 - 1994년) (경제학 · 물리학 / 학사)
- 스탠퍼드 대학교 (1995년) (재료과학 / 중퇴)
1. 개요
미국의 기업인.
남아공에서 태어나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남아공·캐나다 삼중국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에 거주하고 있다.
테슬라, 스페이스X, 스타링크, X, 뉴럴링크, xAI 등 다수의 기술 기업을 보유 및 운영하면서 2020년대 들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가 반열에 등극했다. 뛰어난 기술적 식견과 디자인 감각,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일하는 성실함과 현장 중심적인 경영, 이를 아우르는 미래 지향적 비전 등으로 '최고의 혁신가' 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자신감에 찬 태도와 직설적인 화법 등으로 여러 하마평에 오르기도 한다.[39]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과 인지도를 지닌 기업인이다.
2. 성장 내용
1.1 유년기
197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리토리아에서 엔지니어인 부친 에럴 머스크와 모델 겸 영양사인 모친 메이 머스크[1]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 머스크의 친증조부 해리 머스크(1863~1917)가 잉글랜드 서포크에서 영국 식민지 시절의 남아공으로 이주한 것이 그 시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으로 이민했던 백인 가정의 후손들 중 다수가 재산이 많았던 것도 있고, 아버지인 에롤이 남아공에서 최연소로 기술사 자격을 취득한 우수한 전기 기술자여서 어린 시절 머스크 일가는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에롤은 젊은 시절 에메랄드 광산 채굴권을 헐값에 구입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디펜던트지#에 의하면 에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당시 우리는 매우 부유했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금고의 문을 닫을 수도 없었습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애슐리 반스가 쓴 《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에 따르면 "어린 시절 머스크 일가의 집은 프리토리아에서 가장 큰 집 중 하나였고 에롤은 가족들과 자주 해외여행을 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3]
컴퓨터에 흥미를 가졌던 10살 때 코모도어 VIC-20 컴퓨터를 살 수 있었다.[4]
그러나 이러한 능력적인 부분과는 별개로 일론은 에롤과의 사이가 매우 나쁘다. 일론의 부모는 그가 10대일 때 이혼했는데, 어머니와 산 지 2년 만에 아버지와 같이 살겠다고 했던 것을 훗날 매우 후회했다. 평전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버지에 대한 인터뷰를 아예 거부했다. 한 인터뷰에선 아예 "내 아버지는 악마이자 끔찍한 인간 말종이다. 당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행과 범죄를 다 저질러 본 사람이다."고 말하면서 인터뷰 도중에 울기까지 했다. 이에 에롤이 "철 좀 들어라"고 다시 아들을 공격하는 등 부자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걸로 보인다.[5][6]
1.2. 청소년기
남아공에서의 학창 시절, 그는 몸이 허약한 데다 내성적이며 직설적인 성격, 독특한 성씨 때문에 학우들로부터 따돌림과 더불어 폭행까지 종종 당했다고 한다. 9학년 때는 계단에서 밀려 굴러떨어진 뒤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맞았다고 한다. 이때 코의 재건 수술을 했으며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있어 호흡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 더불어 상술한 부모님의 이혼에다 같이 살던 부친과의 불화로 인하여 일론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고 우울함을 겪은 후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독서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공상에 자주 잠기는 성격이였으며 이런 성향 때문에 모친 메이 머스크에 의하면, 운동에 그다지 소질이 없었고 또래에게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일론 머스크는 프로그래밍에도 흥미를 가졌다. 1984년 만 12세일 때 코모도어 VIC-20와 IBM PC XT를 구입하고 BASIC을 독학해 Blastar[7]라는 이름의 슈팅 게임을 동생과 함께 만들고 이를 게임 잡지에 500달러(현재 가치로 1,200달러)에 판매했다. 우주선을 쏴대는 슈팅 게임이다. 이로 인해 167줄의 소스코드가 <PC와 사무 기술>이라는 출판물에 실리며 1984년, 그의 이름이 대중 앞에 처음 공개된다.[8] 이후 같은 잡지사에 두 개의 게임 코드도 팔았다고 한다.
또한 엔지니어였던 부친이 기술을 전수해 준 덕에 모형 로켓을 만드는 데도 취미가 있어 가솔린과 각종 화학 약품을 혼합하여 로켓 연료를 만들곤 그걸 자작 로켓에 넣어 발사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다만, 학교 시스템에 회의를 느꼈고 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등 특정 과목만을 편애했기 때문에 전반적인 학업 성적이 우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특히 종교와 언어 수업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1.3. 북미로의 이민
1.3.1. 캐나다
10대 초반부터 부친에게 미국으로 이민을 가자고 계속 졸랐으며 이후 청소년 시기를 거쳐 냉전이 끝난 90년대는 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확신해서 미국에서 유학하고 정착하는 걸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징병제를 시행 중이었고, 남아공 국적자였던 머스크도 입영 대상자였다. 머스크는 아파르트헤이트 등 인종 갈등이 만연한 남아공 사회에 경멸감을 느꼈기 때문에 국가를 위하여 군 복무를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9]
처음에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미국 시민권자라는 근거를 들어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였지만 이내 심사에서 탈락되고 말고 자책했으나 그가 17세가 됐을 때 부모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시민자이면, 자녀에게 캐나다 시민권을 줄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된 덕분에 캐나다로 건너가 미국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캐나다는 미국과 지리와 문화적으로 근접한 데다가 미국 영주권 혹은 시민권을 취득하기 용이하기 때문.[10] 머스크는 입대를 미루고 캐나다 이민 성공을 위해서 실제로 학업은 게을리했지만, 서류상 강점을 갖기 위해 남아공에서 프리토리아 대학교를 다니며 1년간의 절차를 거쳐서 새로운 법에 따른 절차를 준비했고 캐나다 당국으로부터 입국을 허가받는다. 그러나 1989년 6월에 캐나다로 떠난 17세의 머스크는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 머스크가 에롤과 멀어지고 난 후 어머니인 메이 쪽은 돈이 별로 없어서 타국으로 떠나는 머스크에게 돈을 대줄 수가 없었고 종조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던 몬트리올의 집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몬트리올의 친척들은 머스크가 오기도 전에 캐나다에서 미국 미네소타로 이민 갔던 것이었다. 때문에 1년가량 캐나다 전역을 방랑자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농장에서 밭일을 하고 제재소의 유독한 보일러 폐기물을 치우거나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자르는 등 인력 시장의 궂은일을 하며 살았다.
일론이 1년 동안 캐나다 전역을 도는 동안, 모친인 메이를 비롯하여 동생 둘도 캐나다 이민에 성공하면서 토론토에서 가족이 재회하게 된다.[11] 가족이 모인 덕분에 온타리오에 위치한 퀸스 대학교(캐나다)[12]에 진학한다. 대학 생활이 체질에 잘 맞아서, 이때부터 사회성이 늘기 시작했다고 한다.[13] 한편으로는 무작정 스코샤뱅크에 전화를 걸어 점심 식사 요청을 하였다가 임원인 피터 니콜슨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여름 인턴십에도 참여하여 시급 14달러를 받아가며 전략 기획 팀에서 개발 도상국 포트폴리오 검토 관련 업무를 맡은 적이 있다고 한다.[14][15]
1.3.2. 미국
미국 진출이라는 당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퀸스에서 학업에 충실했던 덕에, 1993년 여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다. 입학 후 모교 내에서 무면허로 주류를 밀매하는 클럽하우스 사업을 했다고 한다.[16] 이 와중에 1994년 여름, 실리콘밸리에 건너가서 낮에는 피더클 연구소에서 슈퍼 축전기 연구를, 야간 인턴으로는 로켓 사이언스라는 게임 제작사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다. 이 회사가 만든 Loadstar와 Rocket Jockey 등의 게임 크레딧에 실제로 머스크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신생 업체이다 보니, 인턴임에도 임베디드와 드라이버 등 저수준단의 핵심 기술 개발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비디오 게임 사업을 고려했지만, 인류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대학에서는 경제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졸업 직전인 1994년 12월에는 태양열 발전을 주제로 첫 번째 논문를 작성했으며 그 외에도 슈퍼 축전기와 데이터베이스, 로켓 관련해서 연구하고 논문을 집필했다고 한다.[17]
결국 재미는 있었지만 그의 범지구적 공상에는 미치지 못했던 비디오 게임 쪽 진로를 접고 본전공을 이어 고체 물리학 슈퍼 축전기 분야로 1995년 스탠퍼드 대학교 재료공학 박사 과정에 합격한다. 하지만, 야후!와 넷스케이프 등을 통해 발전해 가는 포털과 웹 브라우저 등 인터넷 산업의 풍부한 잠재성에 매료되어 창업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정하면서 실리콘밸리로 이주하여 입학도 채 하기 전에 합격 통지만 받고 휴학을 신청했는데, 이후 등록을 하지 않아 자동 제적되었다.[18][19]
그는 창업하기 전에 본인에게 얼마 정도가 필요한지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실험을 했다. 이른바 ‘일론 머스크의 욕구 실험’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하루를 1달러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창업을 앞두고 혹시나 실패했을 때 뒤따를 가난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1달러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일론은 대형 마트에서 냉동 핫도그와 오렌지 30달러어치를 사서 컴퓨터를 끼고 한 달 동안 매일 그것들만 먹고 생활을 했다. 돈이 없는 삶이 어떠한지를 직접 체험해 본 것이다. 한 달을 지내보니 살만했다고 한다.[20] `어떻게 되든 (망해도) 한 달에 30달러는 벌겠지'라고 생각한 그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이후 곧바로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3. 인간관계
차기 대통령으로 재임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로 차기 정부의 최대 수혜자로 지목된다. 2024년 그가 수천억원을 쏟아부으며 적극적으로 지원한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에 재입성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이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세계 최고의 권력자와, 세계 최대 부자가 만난 것이다. 정치 성향을 떠나서 대세를 읽는 능력은 대단하다는 평도 있다. 트럼프는 머스크에게 당선되면 공직을 줄것이라고 이야기 한적이 있다. 이후 정계에 진출할 것이라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유년 시절 환경은 유복했으나 남아공 탈출 이후부터는 부친 에롤 머스크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여[52] 학자금 대출과 인턴으로 대학교 학비를 냈다고 한다. 다만, 부친이 Zip2에 수만 달러를 투자하며 사업에 도움을 주긴 했다. 어릴 때부터 정신적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할 정도로 좋지 못한 관계이다. 머스크와 나눈 이메일 내용에 따르면 극우 음모론자에다 인종 차별주의자이다.[53] 2010년 이후로는 머스크가 매달 2,000 달러를 입금하며 재정을 지원해 주고 있다고 한다.[54]
칸예 웨스트와 친분이 있다. 실제로 칸예가 대선 후보로 나왔을 때 응원한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으며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물론 칸예의 정치 활동을 진지하게 지지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과학 기술 종사자인 머스크가 생일이당 같은 기독교 반과학주의 정당을 지지할 리가 없다. 2022년에는 칸예의 부름을 받고 Donda 2 리스닝 파티에 특별 참여했다. 다만, 칸예의 트위터 건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024년 2월 발매된 VULTURES의 Carnival이라는 트랙에서 언급되었다.[55]
2017년부터 2018년 2월까지 앰버 허드와 교제했다. 두 사람이 불륜이라는 의혹이 데일리 메일을 통해 제기되었지만, 증거로 나온 엘리베이터 CCTV 사진 속 타임스탬프가 없어서 신빙성은 없다. 헤어진 후에도 인스타를 통해 허드가 머스크와는 계속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고 글을 올리고 서로 멘션을 주고받기도 했다.
2018년 5월 머스크는 멧 갈라(Met Gala)에서 뮤지션 그라임스와 연인임을 공식화했다.# 2020년 그라임스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이름이 매우 특이하고 길어서 화제가 되었다. 2021년 9월에는 그녀와 별거 중이며 자녀는 공동 양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너럴 모터스, 포드 유럽 지부, 크라이슬러, BMW의 전 경영진이었던 밥 루츠는 일론 머스크를 칭찬하면서도 비판적인 입장인데, 머스크에 대해서는 "전기 자동차 하나로 엄청난 걸 달성한 최고의 세일즈맨"이라고 평가하는 반면, 테슬라사에 대해서는 "팔면 팔수록 전기 자동차는 손해인데, 각종 제품들의 공개가 늦어지는 상황에서 전기차만 취급하다가는 금방 파산할 것"이라는 등의 각종 비판적인 발언을 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나아가 2018년 9월에는 칼럼을 통해 테슬라의 CEO 자리에서 내려올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일론 머스크와 테슬라에 대한 충성심 높은 팬덤을 "컬트"라고 칭했던 것은, 머스크가 직접 비꼬는 투로 대응한 적이 있었을 정도. 네티즌들은 대체로 밥 루츠를 비판하는 입장이며, 친환경 차 관련 매체들도 그의 주장에 허점이 있다며 비판하는 입장을 내놓았다.[56] 전기 자동차와 자율 주행 자동차 트렌드에 대해서도 "피할 수 없는 변화"라는 입장을 냈다.
마크 저커버그와 적대적인 관계이다. 먼저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이 위험하다는 견해를 여러 차례 피력하였고, 이 때문에 인공지능 예찬론자인 마크 저커버그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원래는 인공지능 개발을 늦추거나 제한을 둬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현재는 어차피 기술 발전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체념한 듯하다. #
트위터 인수 이후에 다시 저커버그 디스에 돌입했다. 보안을 주요 마케팅 요소로 내세우는 왓츠앱을 두고 보안이 구리다며 디스했고 저커버그가 202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을 위해 4억 달러를 썼다는 내용의 기사를 리트윗하며 열성 민주당 지지자라고 깠다. 트위터를 인수했기에 동종 업계 라이벌을 견제하는 것으로 보인다.[57]
매년 래리 엘리슨의 저택이 위치한 하와이의 라나이섬으로 휴가를 떠날 만큼 그와 절친하다고 한다. 앨리슨은 머스크 등장 이전에 실리콘밸리의 이단아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런 그를 멘토 격으로 여기며 서로 존중하는 사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앨리슨은 테슬라 이사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으며 트위터 인수 전에도 10억 달러를 투자하며 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업무를 위해 실리콘밸리에 출장 올 때마다 래리 페이지의 집에서 묵곤 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으나 인공지능 관련 이슈로 절연했다고 한다. 페이지는 인공지능업계에서 향후 AGI가 나타나 모든 면에서 자연 지능을 능가하게 되더라도 의식이 기계에 의해 복제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인간의 의식만큼 소중하다고 주장하며 구글 내에서 별다른 안전장치를 대비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여긴 반면 머스크는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을 시 인간이 지적으로 우월한 인공지능에게 대체당할 수 있기 때문에 잠재 위험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에 페이지는 머스크가 인간의 종만 편향적으로 우월시하는 종 차별주의자라고 비판했다. 머스크의 이런 견해는 딥마인드의 창업자 데미스 허사비스를 만난 이후로 확립된 것인데 이 때문에 2013년 하반기에 구글이 딥마인드를 인수한다고 하자 크게 반발하며 인수 무산을 위해 공들인 적이 있다.[58] 이후 머스크는 샘 올트먼과 힘을 합쳐 구글-딥마인드에 대응하기 위해 비영리를 표방하며 OpenAI를 설립하기까지 하는데 이 과정에서 구글 인공지능 분야의 최고 인재였던 일리야 수츠케버를 수석 과학자로 몰래 영입하면서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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